사재 10억들여 실물크기 광개토왕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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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홈운영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4,263회 작성일 2004-10-27 16:19본문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계룡장학재단 이인구 이사장 (31회)
한 노(老) 독지가의 고구려사 보존을 향한 끈질긴 집념이 결실을 이뤄 독립기념관 한복판에 실물크기의 광개토대왕비가 우뚝 섰 다.
26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는 광개토대왕비 복제비 제막식이 열렸다. 중국 지린(吉林省)성 지안(集安)에 있 는 높이 6.39m, 무게 38t에 이르는 광개토대왕비를 원래 모양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10억원의 사재를 들여 이 비를 건립, 기증 한 주인공은 계룡장학재단 이인구(73)이사장.
이 이사장은 “만주를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웅대한 역사를 복원 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의 손상에 대비하기 위해 복제비를 건립했다”고 기증 동기를 밝혔다.
그는 또 “후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역사유물을 전하게 됐다 는 기쁨 한쪽으로는 재현성과에 대한 학계나 국민들의 평가가 두 렵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이 광개토대왕비 국내 재현에 착수하게 된 것은 지난 2001년 중국 지안을 방문했을 때부터.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못지 않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문화혁명사 태 당시 홍위병에 의해 광개토대왕비가 폭파될 뻔했다는 얘기를 듣 고 복제비 건립을 서두르게 됐다.
“원래 비석과 같은 크기의 석질인 응회암을 찾아 만주 일대를 샅샅이 누벼 130t 크기의 원석을 찾아냈지요. 이를 수송할 길을 내기 위해 돈을 주고 집을 몇채 헐기도 했습니다. 1600년간 풍화 된 모습과 파괴된 상태의 비문을 재현하는 일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습니다.” 풍화된 암석의 색깔을 내기 위해 인공풍화 공정을 적용했다. 이 어 베이징대 소장 탁본과 대만중앙연구소 소장 탁본을 모본으로 삼아 독특한 서체를 완벽하게 옮겨 놓는 각자원고(刻字原稿)를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조언을 받아 작성했다. 또 중국에서 석공 을 불러 옛날 방식 그대로 정과 망치로만 글자를 새겨넣었다. 그 러나 일부 사학계의 이견으로 공정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 2002년 광복절 건립 계획이 2년이나 뒤로 미뤄지기도 했다. 최 근 고구려 역사 전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기증절차가 마무리돼 이번에 제막식을 갖게 됐다.
“설명비 뒤쪽에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구려 국토를 지도로 새겨 넣었다”는 이 이사장은 “이곳이 선조들이 이룩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후손들이 배우고 느끼는 현장교육의 장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2004-10-27 15:26] 천안〓김창희기자 chkim@
한 노(老) 독지가의 고구려사 보존을 향한 끈질긴 집념이 결실을 이뤄 독립기념관 한복판에 실물크기의 광개토대왕비가 우뚝 섰 다.
26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는 광개토대왕비 복제비 제막식이 열렸다. 중국 지린(吉林省)성 지안(集安)에 있 는 높이 6.39m, 무게 38t에 이르는 광개토대왕비를 원래 모양과 똑같이 만들기 위해 10억원의 사재를 들여 이 비를 건립, 기증 한 주인공은 계룡장학재단 이인구(73)이사장.
이 이사장은 “만주를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웅대한 역사를 복원 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의 손상에 대비하기 위해 복제비를 건립했다”고 기증 동기를 밝혔다.
그는 또 “후손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역사유물을 전하게 됐다 는 기쁨 한쪽으로는 재현성과에 대한 학계나 국민들의 평가가 두 렵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이 광개토대왕비 국내 재현에 착수하게 된 것은 지난 2001년 중국 지안을 방문했을 때부터.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못지 않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문화혁명사 태 당시 홍위병에 의해 광개토대왕비가 폭파될 뻔했다는 얘기를 듣 고 복제비 건립을 서두르게 됐다.
“원래 비석과 같은 크기의 석질인 응회암을 찾아 만주 일대를 샅샅이 누벼 130t 크기의 원석을 찾아냈지요. 이를 수송할 길을 내기 위해 돈을 주고 집을 몇채 헐기도 했습니다. 1600년간 풍화 된 모습과 파괴된 상태의 비문을 재현하는 일이 결코 쉬운 건 아니었습니다.” 풍화된 암석의 색깔을 내기 위해 인공풍화 공정을 적용했다. 이 어 베이징대 소장 탁본과 대만중앙연구소 소장 탁본을 모본으로 삼아 독특한 서체를 완벽하게 옮겨 놓는 각자원고(刻字原稿)를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조언을 받아 작성했다. 또 중국에서 석공 을 불러 옛날 방식 그대로 정과 망치로만 글자를 새겨넣었다. 그 러나 일부 사학계의 이견으로 공정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 2002년 광복절 건립 계획이 2년이나 뒤로 미뤄지기도 했다. 최 근 고구려 역사 전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기증절차가 마무리돼 이번에 제막식을 갖게 됐다.
“설명비 뒤쪽에 광개토대왕 당시의 고구려 국토를 지도로 새겨 넣었다”는 이 이사장은 “이곳이 선조들이 이룩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후손들이 배우고 느끼는 현장교육의 장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2004-10-27 15:26] 천안〓김창희기자 c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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